총공회와 기관들

백영희 목사님은 1959년 고신에서 제명 되고 1966년에 훗날의 교회를 위해 ‘총공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습니다. 1989년 그의 사후 100개의 전국 총공회 교회는 백영희 생전에 대한 평가와 이후 방향을 두고 크게 5가지 노선을 제시합니다. 그 5가지 노선은 총공회 내의 5대 공회로 그 모습을 드러 냈고 이 곳은 각 공회들과 관련 기관을 모두 소개합니다.

부산공회1
부산공회2
부산공회3
대구공회
서울공회

총공회와 기관들 게시판

이우조 권사님 장례 - 배추달 순교자 가족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18.04.10
이름: 이우조(96세)
장소: 울산 영락원

* 입관예배 4월 9일 (월) 오후 3시
* 발인예배 4월 10일 (화) 오전 7시
* 하관예배 4월 10일 (화) 오후 3시
찬송하는 교회 김정부 목사
------------------------------------------------------

이우조(배추달 순교자 가족)

<연구소 '공회인물' 면담 기록 - pkist.net/총공회/인물>

이름: 이우조 권사님
일시: 2012.1.26. 13:00-15:00
장소: 울산시 남구 신정1동 돋질로37가 12-12
면담: 이영인 목사

1. 신상
이름: 이우조
출생: 1923년생 (올해 우리 나이 90세)
고향: 용주면 이사리
남편: 배추봉 - 배추달 형님
자녀: 배문옥, 배명효(50세), 배명희, 배명숙(안산)

2. 친정

- 초등학교
고향에는 4년제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4학년을 공부하여 한글과 일본어를 배우며 한자도 배우게 되었는데, 5, 6학년은 읍에 있는 초등학교로 가서 마쳐야 하기 때문에 포기. 당시 삼촌이 일본에 계셨고 상점을 한다며 점원이 필요하니 조카 우조를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마침 일본에 큰 난리가 나서 일본에는 가지 못함.

- 결혼
1937년 9월 28일, 15세에 이모부의 중신으로 배추달의 둘째 형이 되는 배추봉 신랑(1917년생, 21세)과 결혼, 당시 관습에 따라 결혼 후 1 년을 친정에 있다가 1938년 음력 12월 28일에 시댁으로 신행. 으로 둘째 며느리가 되어 16세에 신행을 왔음.

3. 배추달 가정

- 가족 관계
배추달의 아버지 배한도는 첫 부인 이지순과 결혼하여 배봉추 배추봉(이우조 남편) 2 명 아들을 낳았으나 부인이 병으로 죽자, 이명순과 재혼하여 3 남매 출생. 딸 배시야(90세, 1923년생, 이우조 동갑)과 아들 배추달과 배월도. 배추달은 6.25 전쟁 때 순교하고 동생 배월도는 야로면 정대라는 곳에 살았는데 실성한 상태여서 결혼하지 못하고 죽음. 배시야는 이우조와 90세 지금도 울산 주변에 생존하고 있으며 호계라는 곳에 통합 교회 권사.
- 첫 신앙, 하순이
1939년 2월 16일(음력 38년 12월 28일)에 시집으로 갔을 때 시어머니 이명순은 이미 사촌 종동서 하선이 전도를 받아 아주 잘 믿는 사람. 배추달의 온 집안에서 제일 먼저 믿게 된 분은 하순이. 화양리에는 호주 선교사 전은혜 선생님이 순회를 와서 대청 마루에서 말씀을 전하여 동네 사람들이 와서 듣게 했는데 하선이가 신앙을 출발. 전도를 받고 하선이는 기가 막히도록 좋아함. 원래 친정이 야로면 소래골인데 안 믿다가 화양리 시댁에 와서 믿게 된 것. 시어머니가 많이 괴롭혔음

- 이우조의 합류
이우조가 시댁으로 신행 가던 날에 시어머니는 둘째 며느리 처음 오는 날이라 해서 합천읍교회에 계신 여 전도사님을 초청해 놓았고, 온 동네 사람들은 시집 온 각시를 보려고 모여 들었고 새 며느리를 보는 집이라 잔치 집이고 잔치 음식을 마련해 놓고 전도사님이 방에서 예배를 인도하심. 한 방 가득 찬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계셨음. 각시는 부끄러워 고개만 숙이고 있었으나, 여 전도사님의 그 날 복음은 이우조 그 각시 혼자 다 받고 있었음. 전도사님은 예수님이 좋은 분이라고 열심히 전했고 각시는 고개를 숙였으나 속으로는 저 좋은 예수님을 내가 믿어야겠다고 각오를 했고 그 날 큰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그 날 굳게 결심한 것은 그 후 변치 않고 이 글을 위해 면담하는 90 세까지도 신앙에 일편단심. 원래 친정은 온갖 귀신을 다 섬기던 곳이어서 예수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하고 시집을 왔음.

- 신앙과 박해

묘산면 화양리의 시댁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고 묘산면소재지를 지나 관기리에 가야 관기교회가 있었는데, 하순이 이명순 이우조 배추달 4 명은 20리 시골 길을 걸어 관기교회로 신앙 생활. 1939년 당시 관기교회는 예배당을 막 지었고 교인들은 다 합해서 40 - 50여 명은 되었을 것. 이우조는 은혜를 크게 받았고 처음부터 열심이었으며 집안에 잘 믿는 분들이 있어 시댁으로 가고 신앙을 출발한 지 1주일만인 1939년 2월 4째 주간에 세례와 집사직을 동시에 받음. 삼일예배가 되면, 평일이어서 일에 바쁘고 고 된 생활이나 삼일예배를 일찍 나서야 하니까 식구들이 함께 나서면 시아버지는 아주 성질이 날 수밖에 없고 종종 생칡(칡갱이)으로 삽작을 묶어 놓는데 예배를 드리고 밤 늦게 오면 생칡이어서 끊지도 못하고 싸리 문으로 넘어 들어오기도 어려워 애를 먹다가 어떻게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애를 쓰다 보면 그 사이로 떨어져 엎어 지듯 내리게 됨. 시아버지는 꼴 보기가 싫어 ‘매구 여우같은 것’이라며 난리,
이렇게 뜨겁게 믿는 4 명의 식구들에게는 그 이상으로 반대하는 식구들이 아버지 배한도와 첫 아들 배봉추. 큰 아들은 박해도 컸고 심지어 목사님을 뚜드리는 정도. 그래도 이우조의 남편인 둘째 아들 추봉은 교회를 다니는 가족과 박해하는 가족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있었고 훗날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집사가 되고 62세에 잘 믿고 돌아 가심.
배추달 가정을 전도한 하선이 집사님은 시어머니가 사신 우상을 지독하게 섬겨 핍박도 더 심했는데 화가 나면 담뱃대로 옆을 막 뚜드려 ‘팽팽’ 소리가 났는데 핍박을 너무 하다 보니까 나중에 손가락이 다 옹그라 붙어 고생이 많았음. 나중에 그 시어머니가 믿게 되자 손가락이 다시 펴짐. 믿고 갔고 그 시아버지도 믿고 감.

- 배추달 가정의 경제
가정은 참으로 가난했고 어려웠는데 첫 아들 봉추가 일본을 가게 되자 아내를 시집살이 시키지 않으려고 일본으로 데려 갔고, 둘째 아들인 추봉과 이우조 부부만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게 되고, 시어머니 이명순은 3 남매를 데리고 옆에 작은 다른 집에 살고 있었음. 가난해도 양반이라 해서 무엇을 가리고 따지는 것은 심했으니 배추달의 배 씨는 야로면 정대리에서 북 쪽에는 배 씨가 세력이 있고 남 쪽에는 주 씨가 세력이 있다 해서 남주 북배라 하며 좁은 골짝에서 그런 말을 하고 삶.
배추달은 20세 쯤 될 때 같은 화양 동네에 윤 씨 부자 집에 머슴으로 가게 되었는데 주일과 수요일 예배 때문에 반 머슴살이를 함. 머슴살이를 하러 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머리 굵어 진 아들을 때려서 잡을 수는 없고 달래서 유혹을 하기 위해 ‘윤 씨 그 집안은 양반이어서 야소(’예수‘의 한자어) 믿는 사람들을 몹쓸 사람으로 본다’고 했으나 그런 말에 흔들릴 배추달은 아님. 가난하고 못났다 해도 결혼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배추달은 끝내 결혼하지 못하고 순교. 뒤에 생각하면 깨끗하게 순교 제물로 받기 위해 결혼도 예정 가운데 막았다고 생각 됨.

- 배추달의 신앙
그 때 잘 믿는 사람들은 다 그랬지만 배추달도 머슴을 살면서도 술이나 담배는 심부름도 하지 못한다고 미리 못 박아 놓고 갔고 수요일은 자기 집의 일을 하고 주일만 지키고 나머지 평일은 주인 집에서 머슴을 살았는데 주일에 주인 집에 할 일이 생기면 자기 집 일을 할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 다 주인 집에 일을 해서 주인에게 손해가 되지 않도록 함. 배추달이나 모든 식구들이 죄라는 죄는 그 어떤 죄도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사는 정도.

- 신사참배
모두 열심히 믿던 때가 일제 말기였고 신사참배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죄가 되기 때문에 배추달이나 이우조 등 모든 가족들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음.

4. 일제 해방과 신앙 자유

- 집회
식민지 말기에 합천의 화양리는 워낙 골짝이고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가끔 순회 오는 분은 계셔도 별다른 교회 행사는 없었는데 해방이 되고 주남선 목사님이 감옥에서 돌아 오시니까 주변에는 집회들이 열리기 시작. 여기저기 집회를 하면 은혜가 넘쳤고 가족들은 집회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짐을 싸서 따라 다니고 은혜를 받음. 너무 많이 다녀 기억도 다 못하겠으나 어디든지 빠지지 않고 다님. 너무 행복했던 시기.

- 김만술 집사님
관기교회에는 유명하게 잘 믿는 김만술 집사님이 계셨는데, 원래 가난했으나 남편이 일본에서 돈을 보냈고 그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그 일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김만술은 백영희 조사님 집회에 은혜를 받아 거창의 봉산교회 집회도 가는 분이었고, 모두 백 조사님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당시는 그렇게 유명한 분인 줄 몰랐고 그 분께 받은 은혜는 기억하지 못함. 훗날 묘산 창촌에 묘산교회를 세우고 대구와 거창 집회를 참석하면서 모든 것을 알게 됨. 배추달이나 이우조는 백영희 이름은 알아도 그 은혜 세계는 모르고 있었음.

5. 전쟁과 순교

- 피난길
전쟁이 났고 인민군들이 밀려 들어 온다는 소식이 합천 골짝의 화양리에까지 들렸음. 그들은 교회의 적이라는 소식에 별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이 나서는 피난길에 배추달과 온 가족도 함께 출발. 일단 이우조 부부가 딸 배문옥을 데리고 배추달과 집에 있던 소를 끌고 창녕 가는 창덕면 적포까지 갔으나 낙동강 철교가 끊어져 돌아 옴. 집으로 바로 돌아 오지 못하고 야로 합연에 있었는데 인민군이 점령하고 시간이 좀 흐르면서 사는 모습이 안정 된 것 같아 화양리 집으로 돌아 옴.

- 배추달의 순교
하루는 배추달이 집에 있던 밤나무를 한 손으로 붙들고 ‘형수’를 부름. 서로 신앙에 하나가 되었고 형수였기 때문에 대소사를 형수 이우조와 의논하던 사이.
‘인민군들이 나를 오라해!’
'그래! 오라면 가야지. 그래도 계명 어기는 것은 목숨 바쳐야 해!‘
‘알았어, 알았어!’
그 것이 마지막. 인민군들이 잡아 갔고 주일이 지났는데도 돌아 오지 않아서 시어머니와 이우조 두 사람이 도시락을 싸서 배추달을 데리고 간 인민군들이 있는 묘산면 소재지의 묘산초등학교로 감. 저녁이 되고 밤이 늦어도 돌아 오지 않아 너무 궁금했고, 아침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인민군들에게 가 보기로 함. 인민군에게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담대한 신앙. 하나님께서 간이 크도록 인도하심. 학교로 가서 인민군에게 물었음.‘어제 화양에서 데리고 온 청년은 어디 있습니까?’
‘저 미국 갔어. 미국!’
초등학교 뒤편의 산제 골짝 쪽을 가르치며 좋은 나라 미국에 갔다며 조롱하는 인민군의 말을 듣고 느낌이 이상했으나 일단 초등학교 뒤쪽 산제 골짝으로 배추달을 찾으러 가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고추를 따서 내려 오고 있어 다시 물어 봄.
‘할머니, 어제 인민군들이 화양에서 믿는 청년을 한 사람 데려 왔는데 혹시 아십니까?’
‘아뿔싸! 어제 산제 골짝에서 총 소리가 두 번 났는데...’
두 사람은 할머니가 알려 주는 골짝으로 들어 가서 산을 뒤지기 시작함. 배추달은 산에 누워 있는데 오른 쪽 옆구리와 얼굴에 총을 한 번씩 맞았고 마침 비가 좀 오고 있어 물과 피가 섞여 코에서도 비핏물이 좀 흐르고 옆구리에서도 좀 흘렀음.
두 사람은 임시 좀 닦아 두고 두 사람이 데려 올 수가 없어 시어머니는 관기교회 이대인 집사님과 또 화양에서 내려 가는 길도에 사는 윤선(이 씨나 김 씨) 씨라는 사람을 소리해 달라 해서 순교 현장에 모시고 옴. 미군 비행기들이 수시로 공중을 날고 있던 때여서 비행기 소리가 나면 소나무 아래 숨고 가고 나면 땅을 파고 해서 일단 가매장을 함. 후에 인민군이 물러 가고 나서 남영환 목사님과 거두 목사님들이 와서 고향 화양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음.
현재 한 장 남아 있다는 배추달 사진은 배추달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그 사진이 배추달 사진으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으며, 확실히 배추달 사진이 아님. 함께 믿고 한 집에 살았던 형수와 누나 되는 배시야가 아니라 하는데 누가 그 사진을 내 놓았는지.

- 순교 상황
알려 지기는 모두들 돼지를 몰고 가자 했다는데 돼지가 아니라 ‘개’만 데려 가자고 했음. 주일이라고 개 데려다 주는 것도 못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가 죽었고, 그 것을 본 사람이 전함.
- 순교 후의 가족들
시어머니는 평소에 그렇게 신앙이 있었으나 막상 배추달이 순교를 하자 허망하여 홧병이 들었고 결국 그 병으로 돌아 가심. 며느리 이우조는 시어머니께
‘어머님, 이 세상 천지 사람이 순교의 그 길을 가려 해도 그냥 가는 길이 아닙니다. 감사하입시다.’
‘다른 사람은 다 죽음 앞에 굴합니다. 감사하이소!’
‘나 같은 죄인에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종을 주셨으니 감사합시다.’

그래도 아들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순교를 감사로 받지 못함. 3 남매를 낳았는데 하나는 딸이고 아들이 둘인데 막내는 실성을 해서 사람 노릇을 못했으니 배추달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컸겠는가? 사람도 좋고 건강하고 나무랄 데 없는 아들 하나를 보고 살았으니. 하선이 집사님은 그런 순교에도 기뻐할 신앙이고 평소 자기를 돋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속에 옛사람을 발견해서 밟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시어머니는 그런 정도는 아님.
큰 형인 배봉추는 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첫 마디가 ‘예수 믿으면 집 구석 망하는 줄도 몰랐나!’라고 내 뱉는 정도.

6. 총공회 신앙 출발
- 묘산교회 개척
배추달의 순교 후 전쟁이 끝나고 관기교회는 고려파 교회가 되었고 김만술 집사님은 백 목사님께 크게 은혜를 받은 분이고 또 이우조 집안의 신앙 중심인 하선이 집사님이 부산에서 서부교회를 출석하며 공회 신앙을 받았기 때문에 김만술 집사님이 묘산에 총공회 교회를 개척하고 싶었고 면 소재지 옆에 있던 창촌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이우조 가족들도 묘산교회를 출석. 이후 대구 5월집회와 거창 8월집회를 참석하게 되면서 공회 교훈을 제대로 받음.

- 신앙 비교
과거 고려파에만 있을 때는 자기를 돋우는 신앙으로 살았는데 백 목사님께 배우니까 자기 속에 옛사람을 꺾고 죽이라는 말씀이 위주.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나라는 원수와 싸울 것. 다른 모든 가족들도 이 말씀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돌아 가신 시어머니도 또 배추달의 누나가 되는 배시야도 훗날 3백만 원 돈 문제가 생기자 그 것이 걸려서 시험에 드는데, 신앙은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하는데.

- 묘산교회 교역자들
김만술 집사님이 주도하여 묘산교회가 면 소재지 옆의 창촌에 개척 되었으나 첫 목회자는 김태희 목사님. 거쳐 가신 분은 김태희 정경수 김명재 목사님들. 김태희 김명재 정경수 이런 목사님들은 참으로 하나님만 바라 보는 종. 요즘은 그런 목회자들이 없을 것.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순교자 될 분들. 묘산교회는 창촌에서 나중에 면소재지 장터로 옮기게 되는데 이병준 목사님이 교회 짓고 수고하심. 그래도 앞에 목사님들과 비교하면 좀 떨어짐.

- 정경수 목사님
특히 기억 나는 분이 정경수 목사님인데 말씀도 잘 전했고 주일학생들도 잘 가르쳤으며 학생들이 잘못하면 막대기를 들고 때리는 정도로 엄하고 권위 있고 사랑이 있는 분. 이우조 아들도 맞는 정도. 참으로 똑똑하게 가르 쳤음. 사모님은 주일에는 아기 기저귀 외에는 빨래도 하지 않는 분. 정 목사님의 자녀는 정광희 정광공 정광봉이며 정광봉은 오가는 차를 보면서 차에 적힌 글을 보고 글을 다 배운 똑똑한 사람.

- 가정 구원
남편도 뒷 늦게 믿게 되고 화양에서 창촌까지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믿게 됨. 백 목사님 집회를 가서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하면 다리 아픈 관절도 그 자리에서 벌컥 낫고, 또 그 말씀의 은혜는 표현도 못하겠고. 그래서 백 목사님 생전에 이우조도 부산 서부교회로 갔고, 하선이는 벌써 가 있었고 그 딸이 배이조며 손주는 서부교회 직원으로 오래 근무했던 서은정 선생님.

7. 노년

- 노곡동 기도원
노곡동 기도원에 관리할 사람이 없다 해서 7 - 8 년 정도 그 곳에 있었고 그 당시 큰 딸이 사망. 인산 이재순 목사님이 3 년 위에여서 올해 93 세일 것.

- 울산 신정동교회
노년에 시누가 울산 호계에 있고 또 큰 딸 손주와 둘째 딸이 울산에 있어 울산 신정동교회로 오게 됨. 큰 딸 손주는 울산 UBC 국장

- 고향 교회
고향 묘산 면에는 지금은 교회가 4 개가 있음. 화양, 계동, 관기, 장터에 각각 교회가 하나씩 있음. 관기교회는 이대인 집사님의 아들이 서울에 살면서도 관기교회 장로님으로 활동하며 할 일을 다하고 계심.

- 성경 쓰기
올해 10 번째 성경을 쓰고 있는데 한 해에 2 독을 노트에 적고 있으며 현재 10 번째 적으면서 레위기를 쓰고 있음.

- 관기교회 ‘순교자교회’ 지정식
2011년에 관기교회에서 울산 호계교회에 다니는 시누 배시야 집사님께 전화가 왔고 외손주를 통해 모두 시누 올캐가 함께 관기교회 방문. 고신교단에서 배추달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라 해서 ‘순교자교회 지정식’이 있었음. 관기교회가 인쇄한 기록에 나온 배추달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음.

8. 면담을 마치고
90 세에 아직도 얼굴이 붉어 건강했고 총명했으며 날짜와 당시 상황을 세세히 기억하는 분. 16세에 믿고 75년이 된 90 세에도 처음 믿었던 그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여전히 식지 않고 펄펄 끓고 있었음. 면담을 해 보면 대개 과거에는 참으로 잘 믿었으나 면담하는 때에는 회고적 신앙이 되고 풀이 죽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독 권사님은 끓어 오르는 신앙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특별. 연로한 분들의 은혜란 대개는 감상적 은혜거나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인데 권사님은 말씀의 구별이 있었고 이 노선의 감사와 가치를 알고 계셨고 이 교훈의 내용을 세세하게 되짚으며 핵심을 잡고 계신 분. 일반 교인으로서 이렇게 산 신앙으로 노년을 끝까지 붙든 분은 참으로 희귀하여 면담한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런 평생의 은혜 생활을 하게 되면 슬하 자녀들에게 두루 눈에 띄는 복도 많이 주시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러 계신 것은 노년에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기도의 제목으로 멍에를 얹어 주셨다고 느껴 짐. 예수님 한 분을 이렇게 오랜 세월 변치 않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주님도 권사님에게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되 고난 속에서 사랑하는 참 사랑을 주신다는 것이 눈에 환하게 보여짐.
공회에는 이렇게 귀한 신앙들이 아직도 곳곳에 계시니 보배로운데 이 연세에 고신 교단과 교훈 비교를 정확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감사.

(이 글은 '이우조' 권사님과 면담 후 작성하였고 본인 확인을 부탁해 놓은 상태이며, 재확인이 끝나면 일반 공개와 함께 복사 사용이 자유롭게 되나, 아직은 열람만 하실 단계입니다.)

--------------------------------------------------------------------------------
(관기교회사)

주소: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650-2
토지: 대지 91평
명의: 박지봉
개척: 1921.2.
연혁: 1920년 봄, 합천읍교회 교인 정주상씨가 대서 개업을 하기 위해 묘산면으로가게 됨

관기 -> 최영(돈)교, 고령 전도인 파송, 몇 달 실패, 대신 21년에 함양의 황보기 파견 문한구, 유덕순, 서수철 믿고, 문한구 가정에서 예배 시작. 27년까지 순회, 김동노(번)씨 전도인 가조 마상리에서 격월 순회 30년

목사: 도별익 20-22, 권임함 박영숙 22-25, 이자익 25-36, 고도열 36.10.-
전도인: 최영교(돈)20, 황보기21-27, 김동노(번) 27.4-33.8. 김항립33.9.-
집사: 이세춘(33년), 유옥선(37.1.)) 유해강, 성외흠(38.1.)
건축: 1925년, 신축, 1931년 증축, 1938년. 4-50명, 예배당 건축

---------------------------------------------------------------------------------
(배추달의 일반 자료)

http://cafe.naver.com/chdrhdghl.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87&

출생일 : 1926. 07. 07(음)
순교일 : 1950.

야학에서 한글공부
고등성경학교

배추달은 1926년 7월 7일(음)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26번지에서 태어났다.

배추달의 아버지 배한도씨는 본처에게서 두 아들을 낳고 상처를 하는 바람에 둘째 아내 이지순을 얻어 그 몸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추달과 월도였다.

추달의 아버지 배한도씨는 몸이 약했다. 그럼에도 가정을 이끌어나가려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추달의 어머니 이지순씨가 예수를 믿은 것도 이때였다. 그녀는 거친 세상 살 수 없어 고난을 당할 때 조카 며느리 하선이씨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다.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석했다. 그러나 추달은 학교 갈 나이가 되었어도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여 배움의 기회를 노친 배추달은 18세때 해방이 되자 전국 강토에 문맹퇴치운동이 일어날 때 매일 밤 국민학교 교실에서 하는 한글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오직 그의 목적은 성경을 남처럼 막힘 없이 죽죽 읽고픈 염원에서였다.

전처의 두 아들이 있는 배한도씨에게 후처로 들어간 배추달의 모친은 추달과 추도 두 아들을 낳고 남편이 죽자 조카 며느리 하선히 씨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고 아들 추달은 자연적으로 모친을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농토라곤 한때기도 없는 모친은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추달을 남의 집에 보내졌고 남의 눈치 밥을 먹으며 농사를 지어주다가 8.15해방을 맞은 것이다.

해방 후 1950년 거창읍교회에서는 주남선목사가 모자라는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주무교사는 남영환전도사였다.

배추달은 모처럼 머슴생활을 그만두고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농사일을 하듯 밤낮으로 밝혀 공부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6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주남선목사를 존경하여 그를 닮길를 다짐했다.

고등성경학교를 시작한지 한학기도 되기 전에 6.25가 터졌다. 조기방학을 하고 배운 바를 복습하고 다시 만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온 얼마 후 순경이 나타나 피란 가라고 하는 바람에 추달도 어머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들었으나 공산군에 의해 적포철교가 끊어져 집으로 돌아갔으니 1950년 6월 30일이었다.

고향 화양리로 돌아온 교인들은 교산국민학교 정운택선생의 인도로 구역예배를 마치고 감자를 먹고 있을 때 인민군이 마을가까이 왔으니 남자들은 피해야 한다는 급한 상황에서 정선생과 추달은 급히 몸을 피해 뒷산에 깊숙히 들어가 숯을 굽던 숯가마로 피해 그곳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다가 20일후 7월 중순 마을로 내려왔다.

내려온 날이 마침 주일날이라 예배를 마치고 났을때 인민군과 치안대원이 인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선생과 배추달을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배추달은 주일에는 일을 안 한다고 거부하자 배추달을 내무소로 데리고 가서 미루나무에 매놓은 돼지를 강 쪽으로 몰고 가자고 했다. 그것도 거부하자 비를 주고 마당을 쓸라고 했지만 그것도 거부했다. 인민군은 배추달을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추달을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추달이 24세에 살해된 뒤 감동스러운 일이 생겼다. 추달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사경에 얼마씩을 떼어 주인에게 맡겨놓은 벼 한섬과 돈15만원을 주인이 가지고 와서 화양에 교회를 짖기 위해 추달이 맡겨둔 것이라고 내놓아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에게 전해져 남교회는 헌금을 하여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12평의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해 주었다.

그 후 화양교회는 묘산장터로 옮겨져 묘산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배추달은 주일 성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귀한 교훈을 오늘의 교회에 남겨주었다.
--------------------------------------------------------------------

■ 배추달 선생님 생애 요약

http://dongmoo.info/23209

2008.05.14 10:14:51 (*.247.149.100)

◎ 주남선 전기 '해와 같이 빛나리' 중에서 발췌

5. 순교자 배추달 집사

배추달 집사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일찍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었기에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생활을 하였다.

당시 화양리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곳에서 이십리 밖, 관기리에 교회가 있었다. 관기교회였다. 추달은 어머니와 관기교회를 출석하였다.

추달은 학교를 하지 못했고 집에서 한글을 좀 익혔다. 집이 가난하여 먹는 문제가 항상 염려였다.

추달이 뼈가 굵어지자 남의 집일을 도와 주었다. 머슴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가슴에도 배움에 대한 염원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추달은 남의 집 머슴으로 있었지만 교회생활을 부지런히 잘 하므로써 교회에서 일찍 집사로 임명이 되었다. 관기교회 집사로서 그는 열심으로 신앙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1950년 3월이었다. 거창에서 주남선 목사가 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관기교회에도 날아왔다. 소식을 들은 추달집사의 가슴이 뛰었다. 배우고 싶었다. 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돈이 별로 들지 않아 좋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부모보다 열정적이었다.

“가서 공부를 하도록 해라.”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추달 집사는 거창으로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학생이 된 추달 집사는 너무나 기뻤다. 처음으로 노트에 글을 썼다. 성경을 체계 있게 배우는 일은 그의 가슴을 흐뭇하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감격할 뿐이었다.

머슴살이로 천대받으며 지내야 했던 그가 성경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주로 학과를 가르쳤다.

성경학교의 수업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6·25동란이 터졌다. 성경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식 날, 주 목사님의 설교에 추달 집사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신앙으로 살되 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싶었다. 산 순교자 주 목사님의 행동 하나 하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신앙의 길은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품위를 한결 높혀 준다고 생각하였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추달 집사는 계속 성경을 읽었고 노트를 훑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군들이 묘산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순경들이 피난을 가라고 호령을 했다.

화양리 사람들은 봇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추달 집사도 어머니와 함께 피난에 나섰다.

피난민들은 낙동강 철교가 있는 합천과 창녕의 경계선까지 갔다. 적포철교가 파손되어 끊어져 통행이 중지된 것이었다. 건너 갈 수가 없었다. 화양리 사람들은 그만 되돌아오고 말았다.

화양으로 돌아온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밤, 가정에서 추달 집사와 교인들은 구역 기도회를 가졌다. 예배는 정운택 선생이 인도하였다.

정운택 선생(현재 부산시 이사벨여고 교사)은 당시 묘산국민학교 교사였다. 정 선생은 하동 사람으로 사범학교 졸업 후, 묘산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나서 와 있었다.

기도회를 마치자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선생은 배추달 집사와 함께 뒷산으로 도망갔다. 배 추달은 24살이었는데, 다섯 살은 아래로 볼 정도로 몸이 가늘고 뼈대가 가늘었다.

얼굴이 검고, 죽은 깨가 조금 깔아져 있었다. 그는 관기교회 청년 집사였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는 뒷산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에 숯을 굽던 굴이 있었다. 숯굴에 자리를 정했다.

다음 날, 종일을 숯 굴에 있다가 밤이 되어 내려와 먹을 것을 얻어서 올라갔다.

며칠을 지내니 배 집사 어머니가 걱정을 하여 아들을 타일렀다.

“내려와서 집에 있거라. 뒤는 어찌되든 그냥 지내보는 거지.”

“안되요. 정 선생이 그러는데 잡히면 큰일난데요. 괴뢰군은 지독하답니더.”

줄곧 배 집사는 정 선생과 함께 숯 굴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정 선생과 배 집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정 선생 사촌 누나집에 들렸다. 이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정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부인들이 몇이 참석하였다.

예배가 끝나고 나자 인민군을 앞세우고 지방 치안대원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인부동원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예배를 끝낸 이 집 마루에는 청년이라곤 두 사람뿐이었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였다. 치안대원 중에 정 선생을 잘 아는 분이 있었다. 해서 정 선생은 차마 가자하지 못하고 배추달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따라갑시다. 일을 해야 하겠는데······”

“안됩니다.”

“안되다니?”“오늘은 주일이빈다. 주일은 일을 못합니다.”

“예배는 끝났지만, 주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일이 다 뭐냐? 지금은 전시야! 나라를 구해야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음은 죄가 만항서 그렇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들여야 합니다.”

“이 새끼 아주 악질이구나!”

그들에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의 길이다.

“가자!”

배 추달 집사는 그들에게 끌려 내무서까지 갔다.

“저 벼 한 가마를 방앗간까지 져다 주고 가!”

“못합니다.”

“그렇게 해! 그러면 내일 부역을 면해 준다.”

부역이란 탄약을 지고 영산까지 가는 일이였다. 화양에서 영산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백리 길을 탄약을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일 부역을 하겠습니다.”

배추달 집사는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탄약을 지고 전쟁터를 나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럼 벼 지고 가는 일은 그만 두고, 저 돼지를 몰고 따라가자.”

내무서 앞 미루나무에 매어 둔 돼지를 가리켰다.

“그럴 바엔 벼를 지고 가지요. 돼지를 몰고 가자 함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다시 인민군은 비를 가지고 왔다.

비를 추다 집사에게 주면서

“자, 그럼 이 마당이나 좀 쓸고 가라!”

“안됩니다. 주일에 마당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쓸라고 명령하심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좋아! 그럼 이 비를 받아 들기만 해! 그럼 용서한다.”

“그것도 못합니다. 내가 비를 받으면 마당을 쓸라 할 것이고, 마당을 쓸면 돼지를 몰라 할 것이고, 돼지를 몰면 벼 지고 가자 할 것이고, 그러면 잡일을 다하게 될 것이니 나는 주일을 범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썅, 이 간나새끼!”

인민군의 부릅뜬 눈알이 금시 뚝 삐져 나올 것만 같다.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내무서 안으로 끌고 가 유치했다.

다음 날,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을 쏘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스물 네 살의 젊은 청년 집사 배추달은 순교를 당한 것이었다.

관기교회 이대형 집사가 배추달 집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시체는 두개골과 가슴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두개골에 총을 맞았지만 그의 시체는 험하지 않았다.

타박상의 상처처럼 보였고 얼굴은 평화롭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찬란한 무엇을 바라보듯 황홀경에 빠진 듯,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이대영 집사는 교회에 알리고 배 집사 어머니에게 통지하여 배 집사 시체를 그곳에 가매장 하였다.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창호지로 곱게 덮어 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묻어두었다. 인민군들의 눈이 두려워 정식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가매장을 해 둔 것이었다. 그 날, 배추달 집사가 끌려가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정 선생은 치안대원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윤용환이란 사람의 헛간에 숨어 십오일을 지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에게 발견되어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저녁 무렵, 허술한 틈을 타서 담을 뛰어 넘었다. 뒷산을 향하여 뛰었다. 무사히 숲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 날부터 나무 뿌리를 파먹고, 송피를 벗겨 먹으면서 야생동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20일이 지났다. 얼굴을 숲 밖으로 내밀고 마을 쪽을 살피니 인민군들의 행렬이 삼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후퇴하는 듯 보였다.

일직이 해가 저물 무렵, 고령 쪽에서 유엔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살았구나!”

정운택 선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정 선생은 수복 후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가 금융조합 서기 일을 봤다.

그 해 12월 중순. 남영환 전도사는 관기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주간에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이야기가 나와 장례를 하도록 주선을 하였다.

관을 준비하여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무덤을 팠다. 교인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마니가 그대로 나왔다. 가마니에 응겨붙은 흙을 털고 가마니를 풀었다. 시체가 창호지에 싸인 채 나왔다.

수분이 빠지고 곱게 말라 있었다. 창호지도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를 풀었다. 시체가 하나도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에 총 맞은 가슴과 등 쪽에 노란물이 번져있을 뿐 시체는 깨끗했다. 관에다 그대로 넣었다. 흰 꽃상여에 관을 실어 청년들이 메었다.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장례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성대히 진행되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모든 장례를 집례하였다. 배추달 집사의 관은 그의 집이 있는 화양리 뒷산에 고이 안장되었다.

배추달 집사는 전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화양에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었다.

배추달 집사는 머슴사경 받은 것 가운데서 푼푼이 떼어 주인집에 맡겨 둔 것이 있었다. 순교 후 주인집에서 내어놓은 것이 벼 한 섬 반과 돈 15만환이었다. 주인은 배추달 집사 모친에게,

“이것은 추달이 머슴사경 중에 화양에 교회 짓는다고 별도로 맡겨 둔 것입니다.”
벼와 돈을 내밀었다.

이 사실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는 이 소식을 듣고 화양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당 건축을 서둘렀다.

다음 해, 화양에는 교회당이 서게 되었다. 아담한 교회당이 화양리 마을 중아에 찬란한 십자가 종각을 우뚝 내밀고 서게 되었다.
================================================================================

(이상규 '경남 지역 40인 신앙' 출간서에서)

배추달 1926-1950
무명의 순교자 배추달 청년

경남지방 순교자들 중에서 주기철 목사나 최상림 목사 등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배추달 청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도 6.25 동란이 발발한지 약 40일이 지난 1950년 8월 7일 합천군 묘산면의 묘산초등학교 뒷산에서 24세의 나이로 인민군에 의해 총살됨으로 순교자의 길을 갔으나 그의 사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무현 정권이후 소위 진실규명이라는 이름으로 언필칭 우익에 의한 양민학살은 발굴되고 연구되고 또 규명되고 있으나, 좌익이나 인민군에 의한 학살 규명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배추달 청년은 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계명 준수를 소중히 여기고 주일성수라는 소박한 신앙 때문에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어 순교자의 길을 갔다. 일반적으로 순교로 불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죽음이어야 할 것, 복음증거와 관련된 것이어야 할 것,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죽음이어야 할 등 3가지 조건을 교구하고 있는데,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배추달은 순교자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산하 기독교문화유적보존위원회(위원장 정돈화)는 지난 2011년 5월 24일 경남 칠원교회에서 순교자 배추달을 배출한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600번지에 위치한 관기교회를 ‘순교자기념교회’로 지정했다. 이와 관련한 행사 안내서에 위 위원회의 자문위원인 필자는 배추달 선생에 대해 짧은 소개문을 쓴 일이 있으나 이를 좀 더 확장하여 여기 소개하게 되었다.

순교자 배추달(裵秋達, 1926-1950)dms 1926년 7월 7일(음)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26번지에서 배한도씨와 이지순씨의 5남중 3남으로 출생했다.(주. 배추달의 거창성경학교 학적부에는 생년월일이 1927년 4월 27일로 기제 되어 있다. 이 학적부는 거창교회에 보관되어 있다.) 몸이 허약했던 배한도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배봉추(장남), 배추봉(차남), 배명선(장녀), 배추달(삼남), 그리고 배월도(사남)등 4남1녀는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남편을 잃은 이지순씨는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보고 낙망하고 있을 때 조카 며느리 하선이씨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려 예수를 믿게 되었다. 관기교회는 화양리에서 약 6km 정도의 거리였는데, 이지순씨는 조카 며느리 하선이와 함께 이 교회로 걸어 다니며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핍박이 심했으나 세상에는 기댈 언덕이 없다고 보았던 이지순은 신앙만이 현실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었다. 따라서 배추달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다라 화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살림을 꾸려가기에 어렵게 되자 배추달은 남의 집의 머슴으로 지내던 중 해방을 맞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이때 그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문맹퇴치운동의 영향으로 인근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터득했고, 배움에 목말라하던 그는 거창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가 1950년 4월 10일 설립(개교)한 야간학교였다. 연 3학기 수업을 하되 이름 그대로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로서 평신도 훈련이 목적이었다. 이 학교는 1945년 12월 부산시 부민동에 오종덕 목사가 설립된 고려고등성경학교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부산에 성경학교가 있어야 하듯이 거창에도 이런 류의 학교가 필요하다고 보아 거창성경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설립자는 주남선 목사였으나 실제적인 교무는 남영환 전도사가 맡았다.
배추달은 낮에는 가사일을 돌보며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야간학교에 재학하면서 배추달 청년은 주남선 목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본받고자 했다. 그러나 고등성경학교를 시작한지 한 학기도 되기 전에 6.25동란이 발발했다. 겨우 한 학기를 수료하게 되었다. 필자는 배추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던중 거창성경학교 학적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학적부를 보면 배추달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공관복음서와 데살로니가전서, 그리고 요리 문답을 공부했는데, 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는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요리문답은 주남선 목사가 담당했는데, 이 수업과 예배를 통해 배추달은 주남선 목사의 신앙정신을 배우게 된다. 예상치 못한 전쟁의 발발로 조기방학을 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인민군의 내습이 예상되어 경찰로부터 피난을 권고 받고 배추달도 어머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인민군에 의해 적포철교가 끊어져 할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았다. 이때가 1950년 6월 30일이었다.
고향 화양리로 돌아온 배추달은 교인들과 함께 정운택 집사(묘산초등학교 교사, 후일 부산 이사벨여고 국어교사로 재직하며 거성교회에 출석했다)의 인도로 구역예배를 마쳤을 때 인민군이 마을가까이 왔으니 남자들은 피해야 한다는 급한 전갈을 받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정선생과 배추달은 뒷산에 들어가 피신할 겸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깊은 산으로 가 기도하면서 숨어 지내기 위해 배추달은 4촌 형수 되는 하선이 집사에게 일주일 분 미수가루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가지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 배추달은 약 일주간을 지내고 하산했다. 어떤이는 그 기간이 20여일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배추달은 이 때 이미 죽음을 준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하선이 집사는 회고했는데, 이제는 그도 세상을 떠났고, 하선이 집사의 아들 배문효 장로(삼일교회 은퇴장로)는 모친으로부터 들은 이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산에서 기도하고 돌아온 배추달의 외모는 초췌했으나 믿음은 더욱 확신으로 차 있었다. 그가 하산했을 때가 7월 중순인데, 이날이 마침 주일날이었다. 예배를 마쳤을 때, 화양리 이장인 윤학수의 인도로 인민군과 치안대원들은 인부가 필요하다며 정운택선생과 배추달 청년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교회에 남자라고는 이 두 사람 뿐이었다. 사실은 마을 이장은 이들이 기독교 신자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좌익세력이 볼 때 기독교는 반동세력이었기 때문에 토착 좌익이나 인민군은 항상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표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청년 배추달과 집사였던 정운택을 데리고 가려했으나 치안대원 중에 정운택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는 강요하지 못하고, 배추달 청년에게는 일을 해야 한다며 동행을 요구했다. 특히 이들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벼(나락)를 방앗간에 가서 찧어오라고 요구했다. 배추달은 겸손하게 말했다. “이장님 내일하겠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 예배하는 날이고 내일 시키는데로 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이장과 인민군은 배추달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담아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명령을 거역해!”하면서 의도적으로 주일을 범하게 만들었다. 배추달 청년은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때 인민군과 치안대원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일이 다 뭐냐? 지금은 전시일 따름이다.”며 다시 강요했다. 아무리 전시라고 할지라도 성수주일을 포기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민군은 배추달을 내무소로 데리고 가 미루나무에 매놓은 돼지를 강 쪽으로 몰고 가라고 했다. 그를 위기에 빠뜨릭 위한 묘략이었다. 배추달은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거부하자, 비를 주고 마당을 쓸라고 했다. 그러나 배추달은 이를 거부했다. 대수롭지 않는 일이었으나 배추달은 인민군이 자기를 해하기 위한 의도라는 점을 알아 차렸다. 흔히 배추달 집사라고 말하지만 이 당시 배추달은 집사 임명을 받기 이전이었고 주일학교 교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일 성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 있었다. 이장의 안내로 왔던 인민군은 주일성수를 고수하던 배추달 청년을 끌고가 유치장에 가두었고, 며칠 후인 1950년 8월 7일 그를 묘산초등학교 뒷산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그곳 공동묘지에서 6발의 총으로 총살했다. 신앙을 버리지 않는 악질 분자라는 이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감동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가 머슴살이를 하면서 얻은 수입을 얼마씩 주인에게 맡겨 두었는데, 벼 한섬과 돈 15만원이었다. 주인이 이를 가지고 와서 배추달씨가 자기 고향 화양에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맡겨둔 것이라고 했다. 이 돈이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에게 전해졌다. 남교회는 부족한 금액은 남교회에서 헌금하여 보충하여 이 돈으로 합천군 묘산면 하양리에 12평의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했다. 부산 삼일교회 배문효 은퇴 장로의 모친 하선이 집사가 한명동 목사를 찾아가 순교자 기념교회를 세우자고 간청한 일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후 화양교회는 묘산장터로 옮겨져 묘산중앙교회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교회가 없어졌다.

배추달은 주일 성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였다. 주일날 사소한 일을 거부한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고 그것으로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민군은 우선 그가 기독교신자라는 점에 주목하고, 신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를 모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일종의 함정이었다. 배추달 청년은 그리스도인 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잊혀진 그를 기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 배문효 장로는 그를 기념하여 묘비명이라도 세워야겠다는 의도로 관기교회와 부산 삼일교회의 후원을 화양리 마을 공동묘지의 그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1992년 7월 23일 추모예배를 드렸다. 주일성수를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배추달 청년의 삶의 태도는 오늘 우리를 숙연케 한다.
전체 0

전체 37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
운영 안내 (2)
공지 | 담당 | 2018.03.04 | 추천 0 | 조회 5147
담당 2018.03.04 0 5147
403
[부공2]2020년 8월 청량리교회 자체 집회
403 | 부공2 | 2021.04.06
부공2 2021.04.06 0 695
402
[대공]2021년 5월 집회 - 취소 (2신)
402 | 대공 | 2021.04.06
대공 2021.04.06 0 541
401
[부공4]2021년 5월 부공4집회 - 확인 중
401 | 부공4 | 2021.04.06
부공4 2021.04.06 0 532
400
[부공3]2021년 5월 내계 집회 - 예정
400 | 부공3 | 2021.04.06
부공3 2021.04.06 0 515
399
[부공2]2021년 5월 가평 집회 - 개별 집회
399 | 부공2 | 2021.04.06
부공2 2021.04.06 0 413
398
[부공1]2020년 5월 도평집회 - 확인 중
398 | 부공1 | 2021.04.06
부공1 2021.04.06 0 423
251
2021년 5월 집회 계획 (2신)
251 | 담당 | 2021.04.06
담당 2021.04.06 0 455
250
[부공3] 2021년 4월 교역자회 및 양성원 강좌 - 보고
250 | 교학실 | 2021.03.30
교학실 2021.03.30 0 503
249
고신교단, 실시간, 재독 예배 모두 인정...
249 | 회원 | 2021.03.15
회원 2021.03.15 0 712
248
[부공3]2021년 3월 교역자회 및 양성원 강좌 - 보고
248 | 교학실 | 2021.03.03
교학실 2021.03.03 0 646
397
(대공) 교회 개척, 유학
397 | (대공) | 2021.02.28
(대공) 2021.02.28 0 701
247
(대공) 제60회 총공회 3월 8일 개최
247 | 회원 | 2021.02.28
회원 2021.02.28 0 586
246
교육부, 총신대에 여성 이사 임명 - 총신대, 신학에 틀린다
246 | 서기 | 2021.02.25
서기 2021.02.25 0 586
245
연구소 방문인에 대한 '결혼 추진'
245 | 서기 | 2021.02.14
서기 2021.02.14 0 753
244
(교계)코로나 방역의 정부와 언론을 비판한다 - 손현보, 세계로교회
244 | 외부 | 2021.02.05
외부 2021.02.05 0 648

을 이용하시면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즉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전남 여수 여순로 419-5
010-5626-0580 / pkist.net@gmail.com / 사이트 모든 자료에 대한 무단 수집 등 금지